책 리뷰

[영하게책방]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시집

영하게 2021. 4. 1. 21:29

당신의 계절에 함께 하고 싶어요

 

사계절 가까이 두고 싶은 책을 만났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꺼내고, 무더위 열을 식히며 선풍기 앞에서 여름 챕터를 읽고,

쌀쌀해지는 가을에는 먼지가 쌓인 책장에서 꺼내 들고,

겨울에는 추위를 녹이기 위해 난로 앞에서 펼쳐 드는 책. 

바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책이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오랜만에 간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평소 같으면 지나가는 종류의 책이었지만

제목이 주는 강렬함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표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집을 읽기도 전에 시인이랑 만난 기분이었다.

조심스러움과 망설임이 담긴 문장.

그럼에도 담담하게 건네는 말이 참 좋았다. 

그렇게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시인의 말이 이렇게 멋질 수 있는가...?

계속해서 문장을 소화하고 싶어서 곱씹어 읽어보기를 반복했다.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박준 시집 中

 

각 챕터별로 좋았던 문구들, 느낀 점들을 하나씩 적어보려고 한다.

 


 

1부. 내가 세상을 아직 좋아하는 데에는 

 

 

각 챕터의 제목은 시 문장 중에 좋은 문장을 쓴 듯했다.

'내가 세상을 아직 좋아하는 데에는'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속으로 생각했던 건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지만, 그래도 살만한 순간들을 적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세상을 좋아하는 데에는
우리의 끝이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
-박준 시집 '삼월의 나무' 中

 

그중 이 문장이 제일 좋아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든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언제나 한결같은 나무가 있다는 사실. 

그 나무와 함께한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는 기분이었다. 

 

시는 읽는 사람마다 너무나 다르겠지만

문장이 주는 위로에 나는 위로받았다. 

 


 

2부.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라는 문장을 봤을 땐, 

읽기 전 '누군가와 이별을 하는 순간인가?'하고 생각했다. 

 

  • 2부 중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이별한 사람들의 마음을 쓴 시라고 봤는데

누군가와 이별하면 그 사람과 갔던 장소만 봐도 

눈물을 흘리거나 추억에 잠기는 순간들을 담은 것 같았다.

표현 중 '서로가 없어도 그 자리엔 잔상들이 자랐다'라는 말이 좋았다.

뜨겁고, 차갑고 했던 당신과의 연애의 잔상.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 자리엔 잔상들이 자랐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목소리>
병도 오래가면 정들어서 안 떠난다.
일어나, 일어나요

 

최근 개인적으로 '병'에 관한 이슈가 있어서 그런지

이 문장이 참으로 정이 갔다. 

처음 듣는 생소한 병에 몇 번이고 검색하고, 카페도 가입하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예후가 좋다는 말보다는 당장의 아픔에 몰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병과 정들기 싫었다. 이 문장을 읽고 그래. 일어나자라고 다짐했다.

 

  • <처서>
바람이 불던 날에 옆집 사람의 빨랫감이
날아오기도 했는데
그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예전에 아파트를 지나고 있는데, 

5층의 빨랫감이 1층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의 당황스러움, 빨랫감의 자유분방한 비행을 보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시인은 옷들의 색을 눈에 넣으며 여름의 끝을 보냈다니

여름이 주는 활기찬 색이 에너지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3부.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이틀 후에 오는 반가움이라...

나에게는 지나고 보면 감사했던 순간들이나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3부에 <능곡 빌라>라는 시가 있는데 문장 중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힘든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아... 맞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아있는 사람이 버티는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머무는 힘. 

 


4부.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이 챕터를 펼쳤을 때는 

예전에 지나간 말들이 꽂히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군가 툭 건넨 말이 현실이 되는 것. 때론 위로가 되는 순간들...

흐르고 흘러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말들이 떠올랐다.

 


 

'과거의 어떤 말들이 시간을 건너 현재의 내게로 도착하는 순간을 그리는 시'

이 문장이 시인의 책을 정리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도 이 문장에 공감을 많이 하는데, 말은 심긴다고 하지 않나.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다니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하는 말들도 남한테 심길 수 있으니

좋은 말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말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